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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과거 응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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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과거 응원가에 대해 서술한 문서. 2000년대까진 CD판 가사과 실제 가사가 다른 경우가 꽤 많다.
2. 연도별[편집]
2.1. 1980년대[편집]
1980년대에 뛰었던 선수들은 1985년과 1986년 이후에 출시했던 카세트 음원의 연주가 약간 다르다.
2.1.1. 마츠모토 타다시[편집]
1980년대 요미우리 타선의 간판 1번 타자이자 센트럴리그 단일시즌 최다 도루 기록(1983년, 76도루)을 보유 중인 마츠모토 타다시의 응원가.
전주 부분은 현재 경기 개시 전 요미우리의 선발 멤버들의 응원가를 1번-9번까지 차례대로 부를 때 전주로 사용되고 있다.
2.1.2. 오카자키 카오루[편집]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 걸쳐 팀의 주전 내야수로 활약한 오카자키 카오루의 응원가.
나고야 구장 원정경기 한정으로 오카자키역과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에서 팬들이 메이테츠 특급 노선에 빗댄 가사로 바꿔서 불렀다는 카더라가 있다. 정작 선수 본인은 오이타현 출신으로 주쿄권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게 함정.
2.1.3. 시노즈카 카즈노리(시노즈카 토시오)[편집]
1980년대 요미우리 타선의 주축 교타자이자 수위타자 2회 수상에 빛난 시노즈카 카즈노리(1992년 토시오에서 카즈노리로 개명)의 응원가. 1986년에 앞부분 가사가 변경되었다.
2.1.4. 하라 타츠노리[편집]
오 사다하루의 은퇴 이후 1980년대 요미우리의 4번 타자로 맹활약한 하라 타츠노리의 응원가. 은퇴 후 2002년부턴 감독 응원가로 다시 쓰여오고 있다.
2.1.5. 워렌 크로마티[편집]
하라 타츠노리와 함께 1980년대 요미우리 타선의 중심을 맡았던 외국인 선수 워렌 크로마티의 응원가. 선수 본인의 이름을 이용한 언어유희가 특징.
2.1.6. 요시무라 사다아키[편집]
코라쿠엔 구장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1987년에 3할-30홈런을 기록한 강타자이자 바로 다음 시즌인 1988년에 경기 중 입은 부상[2] 으로 선수생활에 큰 위기를 겪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은퇴하는 1998년까지 준주전 및 대타로 활약을 이어온 요시무라 사다아키의 응원가. 1986년에 등번호를 55번에서 7번으로 바꾸면서 가사 앞부분이 변경되었다.
2.1.7. 나카하타 키요시[편집]
1980년대 요미우리 타선의 주전 1루수로 활약한 나카하타 키요시의 응원가. CD음원에서는 우타자라는 점을 고려했는지 가사 뒷부분이 '레프트' 스탠드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홈 경기에서 응원석이 우측 외야에 있기 때문에 '라이트' 스탠드로 불렸고, CD판 가사는 주로 응원석이 좌측 외야에 있는 원정 경기에서 불렸다고 한다.
2.1.8. 코마다 노리히로[편집]
나카하타 키요시의 뒤를 이어 요미우리의 1루수를 맡았던 코마다 노리히로의 응원가. 원래는 아래 소개할 코노 쥰키의 응원가가 쓰였는데 후에 응원가가 새로 바뀌었다.
얼굴이 귀엽다는 가사 때문에 나중엔 병맛 응원가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심지어 처음 나올 당시엔 가사 첫 부분이 '얼굴이 긴 코마다'나 "얼굴은 귀여운 3급품"으로 불렸다는 카더라까지 있다(...)
2.1.9. 야마쿠라 카즈히로[편집]
1980년대 요미우리의 주전 포수이자 1987년 센트럴리그 MVP를 수상했던 야마쿠라 카즈히로의 응원가. CD판과 실제 경기에서 사용된 가사가 다른데 야마쿠라가 의외(意外)가 붙은 가사가 자신을 공갈포[5] 로 빗댄다며 싫어했기 때문에 CD판에선 가사를 바꿨다는 카더라가 있다.
2.1.10. 카와이 마사히로[편집]
번트 세계 기록(통산 533번트)을 수립한 뛰어난 작전 수행능력과 준수한 수비력을 앞세워 1990년대 요미우리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한 카와이 마사히로의 응원가.
2.1.11. 코노 쥰키[편집]
1985년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트레이드로 이적하여 1980년대 중후반 팀의 준레귤러 내야수로 뛰었던 코노 쥰키의 응원가. 본래는 코마다 노리히로가 데뷔 초에 쓰던 응원가였으나(당시 가사는 불명) 코노가 이적한 후에 유용되었다고 한다.
코노는 1992년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로 이적했으나 2년간 19시합 출장에 그친 채 팀명이 베이스타즈로 바뀐 1993년을 끝으로 방출되었고, 이후 홍순기라는 이름으로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으나 여기서도 소통 문제와 성적 부진으로 19시합 출장에 그친 채 1년 만에 방출되어 현역에서 은퇴했다.
2.1.12. 무라타 신이치[편집]
1990년대 팀의 주전 포수를 맡았던 무라타 신이치의 응원가. 응원가 자체는 1980년대 초중반에 나왔지만 선수 본인의 1군 정착이 늦었다.
2.1.13. 에가와 스구루[편집]
코시엔에서의 활약, 요미우리 입단 과정을 둘러싼 논란 등 많은 에피소드를 낳았던 198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투수 에가와 스구루의 응원가.
가사 후반부의 されど野球는 그다지 별것 아닌 듯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중요한 것일 수 있다는 뜻의 격언인 'たかが○○ されど○○(기껏해야 ○○, 하지만 ○○)'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2.1.14. 니시모토 타카시[편집]
에가와 스구루와 함께 1980년대 초반 요미우리의 양대 에이스로 활약했던 니시모토 타카시의 응원가.
1986년판 음원의 경우 요미우리가 최초로 선수 응원가를 CD를 발매했던 1988년판엔 해당 음원이 수록되었으나 은퇴 이후 과거 응원가를 복각한 CD엔 1985년판 음원이 수록되었기 때문에 현재까지 복각이 안 된 상황이다.
2.1.15. 사이토 마사키[편집]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중반 요미우리의 주축 선발 투수이자 같은 선발진의 일원이었던 쿠와타 마스미, 마키하라 히로미와 함께 쿄진의 세 기둥으로 불린 사이토 마사키의 응원가.
삼진의 어감에 맞춘 것으로 보이는 가사의 1-2-3의 운율이 특징으로, 마키하라와 함께 1997년에 가사가 바뀌었다.
2.1.16. 마키하라 히로미[편집]
같은 선발진의 일원이었던 사이토 마사키, 쿠와타 마스미와 함께 쿄진의 세 기둥으로 불린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중반 요미우리의 주축 선발 투수이자 20세기 최후의 퍼펙트 게임 달성자였던 마키하라 히로미의 응원가. 1997년에 사이토와 함께 가사가 바뀌었다.
2.1.17. 쿠와타 마스미[편집]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넘버인 18번의 계보를 이었던 투수이자 같은 선발 투수진의 일원이었던 사이토 마사키, 마키하라 히로미와 함께 쿄진의 세 기둥으로 불린 쿠와타 마스미의 응원가.
가사가 바뀐 사이토, 마키하라와는 달리 요미우리에서 퇴단할 때까지 응원가가 계속 유지되었다.
2.2. 1990년대[편집]
2.2.1. 고토 코지[편집]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요미우리의 대타 요원으로 활약한 고토 코지의 응원가. 은퇴 후엔 두산 베어스의 코치로 한국 야구팬들에게 알려져 있다.
CD판과 실제 쓰인 가사가 다르다.
2.2.2. 모토키 다이스케[편집]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 팀의 주전 내야수로 활약한 모토키 다이스케의 응원가.
1994년에 응원가가 새로 변경되었고, 2000년에 가사를 일부 바꿔서 은퇴 때까지 계속 사용했다.
2.2.3. 마츠이 히데키[편집]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의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던 거포 타자 마츠이 히데키의 응원가. 이후 마츠이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진출하여 2009년 월드 시리즈 MVP를 수상하는 등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2.2.4. 오치아이 히로미츠[편집]
타격 삼관왕 3회 수상에 빛나는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우타자 중 한 명인 오치아이 히로미츠의 응원가. FA 이적 당시 나이가 이미 40세가 넘었던 탓에 전성기만큼의 활약은 보여주진 못했으나 그래도 요미우리 재적 3년간 준수한 타격 실력을 과시하며 2번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2.2.5. 니시 토시히사[편집]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중반까지 요미우리의 2루를 지킨 니시 토시히사의 응원가. 1998년 시즌 도중(추정) 가사가 바뀌었으나 CD판은 변경 이전의 가사를 계속 수록했다.
2.2.6. 시미즈 타카유키[편집]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걸쳐 팀의 테이블 세터로 활약한 교타자이자 요미우리 구단 단일시즌 최다 안타 기록(2002년, 191안타)을 보유한 시미즈 타카유키의 응원가. Go West를 전주로 사용했는데 CD판 음원에선 저작권 문제 때문인지 전주가 생략되었다.
가사가 각각 1998년 도중(추정), 2008년 2차례 변경되었는데 2008년판 가사는 1996년 최초로 나왔을 당시의 가사를 일부만 바꿔서 불렀으며 CD 음원 역시 1996년판 음원이 그대로 수록되었다.
2.2.7. 키요하라 카즈히로[편집]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FA 선언으로 이적하여 클린업을 맡았던 키요하라 카즈히로의 응원가. 비록 키요하라는 부상 등으로 요미우리 시절엔 들쭉날쭉한 활약을 보여줬고 말년엔 기용 문제를 두고 프런트 및 코지진과 트러블을 일으키며 좋지 않은 모양새로 팀을 떠났지만 특유의 호쾌한 인상과 왕년의 스타가 어릴 적 오매불망하던 명문 구단의 간판 타자를 맡는다는 스토리 등으로 그 인기만큼은 절정을 자랑했다.
이적 첫 시즌인 1997년엔 센트럴리그의 경쟁 구단들(+야부 케이이치)을 모조리 때려잡자는 내용의 CD판 가사를 그대로 사용했으나 1998년 시즌 도중에 197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다룬 애니메이션 사무라이 자이언츠의 주제가에서 따온 전주를 새롭게 추가함과 동시에 가사가 변경되었다. 다만 CD판은 키요하라가 퇴단할 때까지 원래 가사를 그대로 수록했고 저작권 문제 때문인지 전주도 도입하지 않았다.
2.2.8. 타카하시 요시노부[편집]
1990년대 후반~2000년대 후반에 걸쳐 팀의 중심타자로 맹활약했으며, 은퇴 직후인 2016~2018년엔 팀의 감독을 역임했던 타카하시 요시노부의 응원가.
CD판 가사와 실제 쓰인 가사가 다르며 2008년에 앞부분 가사가 바뀌었다. CD판 가사가 실제로 쓰였는지는 불명.
2.2.9. 니오카 토모히로[편집]
2000년대 팀의 공격형 유격수로 맹활약한 니오카 토모히로의 응원가. 2008년에 응원가가 새로 바뀌었으나 하필 그 해에 본인이 불륜 소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시즌 종료 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로 쫓겨나듯이 트레이드되며 2번째 응원가는 1년 만에 사용이 중단되고 말았다.
2.2.10. 우에하라 코지[편집]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투수이자 메이저리그 이적 후엔 구원투수로써 준수한 커리어를 기록한 우에하라 코지의 응원가.
2.3. 2000년대[편집]
2.3.1. 에토 아키라[편집]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FA로 이적하여 2000년대 초반 팀의 중심타자를 맡았던 에토 아키라의 응원가.
2.3.2. 쿠도 키미야스[편집]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암흑기 청산과 강팀 도약에 기여한 후 FA로 이적하여 2000년대 초 요미우리의 2회 우승(2000, 2002)을 이끌었던 베테랑 투수 쿠도 키미야스의 응원가.
2.3.3. 아베 신노스케[편집]
2000년대~201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이끌었던 구단 사상 최고의 공격형 포수 아베 신노스케의 응원가. 2008년에 응원가가 새로 변경되어 은퇴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2.3.4. 터피 로즈[편집]
2000년대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슬러거 중 한 명이자 호리우치 츠네오 감독 시기 팀의 중심타자를 맡았던 터피 로즈의 응원가. 다만 로즈의 요미우리 시절은 첫 해인 2004년엔 양대리그 홈런왕을 달성하며 준수한 성적을 거뒀으나 다음 해인 2005년엔 성적 부진과 함께 팀 수뇌진과의 불화, 돌출 발언 등으로 여러 가지 물의를 빚었고 결국 그 해 시즌 종료 후 호리우치 감독의 퇴임과 함께 방출되면서 좋지 못한 마무리로 헤어졌다.
2.3.5. 타니 요시토모[편집]
본래는 오릭스 버팔로즈의 중심타자였으나 성적 부진으로 인해 트레이드를 거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던 타니 요시토모의 응원가. 이후 타니는 요미우리에서 부활에 성공하여 비록 규정타석 도달은 이적 첫 시즌인 2007년에 그쳤지만 2009년까지 100시합 이상을 출장하며 주축 외야수로 활약을 이어갔고 2014년 데뷔팀 오릭스 버팔로즈로 재이적하여 다음 해 은퇴했다.
2.3.6. 키무라 타쿠야[편집]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트레이드를 통해 이적하여 은퇴하는 2009년까지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활약했던 키무라 타쿠야의 응원가. 키무라는 은퇴 직후 코치로 전임했으나 안타깝게도 코치 데뷔 시즌이었던 2010년 개막 직후 급성 뇌출혈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2.3.7. 오가사와라 미치히로[편집]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FA로 이적하여 2000년대 후반 팀의 중심타자로 활약했던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의 응원가. 가사에 오가사와라 본인의 이름이 표기만 약간 변형되어 들어가 있다.
오가사와라는 FA 이적 후 2010년까지 매년마다 3할-30홈런, 2007년 센트럴리그 MVP 등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역대 최고의 FA 계약으로 평가해도 과언이 아닌 활약을 보여줬다.
2.3.8. 알렉스 라미레스[편집]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슬러거로 활약하다 2008년 요미우리로 이적해 온 알렉스 라미레스의 응원가. 라미레스는 요미우리 이적 후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아베 신노스케 등과 함께 슬러거 타선을 구축하며 2008-09시즌 2년 연속 센트럴리그 MVP에 빛나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고, 요미우리 퇴단 후엔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로 이적하여 2013년 외국인 선수 최초의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한 뒤 현역에서 은퇴했다.
2.3.9. 이승엽[편집]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이적하여 2006~2010년까지 뛰었던 이승엽의 응원가. 요미우리 시절의 이승엽은 2년 연속 30홈런을 기록했던 2006~2007년[12] 을 제외하면 부상과 성적 부진에 시달리며 먹튀에 그치긴 했지만, 그래도 2006년의 활약이 워낙 역대급이었던 데다 라이벌팀인 한신과의 맞대결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준 덕분에 오늘날까지 먹튀 평가와는 별개로 팬들에게서 좋은 이미지로 남아있다.
응원가 가사의 번역 출처는 당시 선수 응원가 CD에 수록된 가사 카드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왔음을 밝힌다.
2.3.10. 와키야 료타[편집]
2006~2013, 2016~2018년[13] 까지 내야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뛰었던 와키야 료타의 응원가.
2.3.11. 우츠미 테츠야[편집]
2000년대 중후반~2010년대 초 요미우리의 주축 선발 투수이자 2011-12시즌에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우츠미 테츠야의 응원가. 이후 우츠미는 2019년 FA로 이적한 스미타니 긴지로의 보상선수로 지명되면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적하게 되었고 이후 세이부에서 3년간 뛰다 2022년을 끝으로 은퇴하여 코치로 전임했다.
[1] 현역 시절 발매된 카세트판 음원엔 전주 부분의 가사가 빠졌다.[2] 수비 도중 같은 팀 외야수였던 사카에무라 타다히로와 충돌하여 무릎 인대 4개 중 3개가 끊어지는 큰 부상을 입었다. 이후 여러 번의 수술을 거쳐 무사히 복귀에 성공했으나 아쉽게도 부상 이전의 기량을 되찾지는 못했고 후유증까지 겹치면서 이후엔 주전에선 밀려난 채 준주전 및 대타 요원으로 선수생활을 이어갔다.[3] 원문은 벌의 일격(蜂の一刺し)으로 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보통 목숨을 건 일격 등을 비유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꿀벌은 벌침을 한 번 놓으면 즉사하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는 듯.[4] 이 부분을 크게 외쳐서 불렀다.[5] 다만 선수 본인이 현역 시절에 일본프로야구 최후의 규정타석 1할 타자(1982년 .196)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컨택은 매우 나쁜데 장타력은 괜찮은 공갈포 유형의 선수로 유명했다. 실제 가사의 의외성 운운하는 것 역시 워낙 컨택이 나쁜지라 팬들도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의외의 한 방을 종종 보여준다는 이유로 붙은 것. 그래도 현역 후반기에 어느 정도 컨택이 개선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1987년엔 타율 .273/OPS .848 22홈런 66타점의 맹활약으로 그 해 리그 MVP까지 수상하는 커리어하이를 찍었지만 바로 다음 시즌에 타율이 1할대로 급락하며 주전포수에서 밀려났고 결국 1990년을 끝으로 은퇴했다.[6] 2019년 자이언츠-호크스 OB전 당시 팬들이 부른 영상이다.[7] CD판에서는 해당 구호가 생략되었으나 가사 카드엔 그대로 수록되었다.[8] 2012년 요코하마 OB 행사에 참석했을 당시 요미우리 팬들이 응원가를 부른 영상이다.[9] 2023년 5월 27일 한신 코시엔 구장 원정경기에서 팬들이 부른 영상. 이날 경기는 한신 타이거스의 레전드 OB 노미 아츠시가 시구자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레전드 OB인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시타자로 나오는 레전드 시구식 행사가 열렸다.[10] 柔能制剛.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의미의 고사성어.[11] 선수 본인의 이름(道大)과 표기는 다르지만 발음은 동일하다.[혼을] [닿아라] [12] 이 중 이적 첫 해인 2006년엔 주전들이 잇따라 부상으로 팀을 이탈하는 와중에도 타율 .323/OPS 1.003 41홈런 108타점을 기록하며 2년 연속 B클래스로 휘청이던 팀을 사실상 타선에서 혼자 견인했지만, 2년차인 2007년엔 시즌 초에 당한 손가락 부상으로 인해 타격 밸런스가 무너지며 타율 .274/OPS .823 30홈런 74타점의 아쉬운 성적에 그쳤고, 이후 수술로 부상을 회복했지만 타격 밸런스가 돌아오지 않은 것에 더해 고질적인 선구안 문제 등이 겹치며 결국 2007년을 끝으로 남은 일본에서의 선수생활 내내 성적 부진에 시달리게 되었다.[13] 중간인 2014년에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FA 이적한 카타오카 야스유키의 보상선수로 지명되어 세이부로 이적했다가 2015년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하여 요미우리로 복귀했다. FA 보상선수 지명을 경험한 선수 중 최초로 FA를 통해 원소속팀에 복귀한 선수.